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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득용 시인, 문경문학관 이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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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암산 앞에서 이오장
걷고 걸어도 머리 위에 뜬 해를
부리지 못하는 지평선의 고장 김제
허리 굽은 어머니 지팡이가
논두렁에 낙숫물 구멍 뚫으면서도
보름달 질 때까지 베틀에 앉아
바디질 소리로 새벽을 불렀지
부티에 묶인 허리 한 번 펴지 못하시고
최활걸음으로 마당을 저으며
삼베 모시 무명베를 짠 피륙
풀 먹여 숯불에 다림질로 곱게 접어놓고
때맞춘 바느질로 옷가지 만들었지
마당을 가르는 기다란 빨랫줄에
모시베 펄럭이는 모습 꿈속에 그렸어도
어머니 피땀 어린
삼베옷 한 벌 남기지 못했는데
충청도와 경상도를 가르는 계립령이
맨 처음 하늘을 연 고개라 하여
물어물어 찾아가는 길에
관음리 동구에 들어서자마자
베틀에 앉은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
삼베 늘어놓으며 허리 펴는 모습이
바위 봉우리에 뚜렷하게 펼쳐진다
걸음 멈춰 한참을 바라보니
삼베 빛 물든 바위가 흰구름 쓰고
어머니와 함께 너울너울 춤추고 있다
일상적인 의미영역을 뛰어넘은 이 시는 논리적 수사를 환기시키는 키아스무스(Chiasmus)의 논증묘사로 반전되는 시적 구조의 기교가 절묘하다. “걷고 걸어도 머리 위에 뜬 해/ 부리지 못하는 지평선의 고장 김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하늘과 땅이 맞닿은 만경평야의 지평선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시인은 고향인 김제와 어머니를 키워드로 시작하고 있다. 밤이 이슥하도록 “보름달 질 때까지 베틀에 앉아” 길쌈을 하시던 고단한 어머니의 노동을 세밀화(miniature)로 적고 있다. ‘바디질’ 씨를 치는 일이며, 베틀의 말코 양쪽 끝에 끈으로 묶은 ‘부티’ 때문에 하루종일 허리 한번 펴보지 못하고 활처럼 등이 휜 나무오리가 되어 ‘최활걸음으로’ 마당을 나서는 어머니가 새벽별로 떠오른다. 당신이 피땀으로 짠 삼베옷 한 벌 남기지 않은 채 떠나신 어머니를 “때맞춘 바느질로 옷가지 만들”었지만 모시베 펄럭이는 꿈속에서 만나는 시인의 사모곡이 절절하다.
계립령은 하늘재의 옛 이름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두대간에서 맨 처음 하늘을 연 첫 고갯길이 궁금하여 시인은 계립령을 찾아온다. 신라 아달라왕 156년에 개척되어 온달장군, 마의태자와 덕주공주, 궁예와 왕건, 공민왕 등 역사적 인물의 설화를 비경처럼 간직한 하늘재에 우뚝 솟은 포암산은 월악산, 주흘산, 신선봉, 조령산 등과 함께 조령5악이라 불린다. 충주쪽에서 바라보면 전형적인 육산으로 중후한 반면 관음리에서 마주서면 감히 범접하지 못할 바위산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감흥의 차이가 크다. 깎아지른 절벽이 수백길 넓은 암벽에 수직방향 문양이 마치 큰 삼베를 펼친 것 같다하여 ‘베바우산’이라고도 한다. 관음리에 들어선 시인은 순간 “베틀에 앉은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 삼베 늘어놓으며 허리 펴는” 포암산(布巖山, 961.7m)을 만난다. 어머니가 길쌈 한 삼베가 포암산 바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다. 어머니 한평생이 벽화로 새겨진 황홀한 장관이다.
자연이 빚어낸 포암산 절경 앞에 숙연해지는 시인은 걸음을 멈춘다. 어머니의 모진 인고의 세월은 자신의 것이 아닌 지아비와 아들 딸 자식들을 위한 사랑이었고 헌신이었으며 희생이었다. 가난에 몸서리치면서도 세상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거나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로 조심조심 살아오신 어머니가 무척 그리운 날 오늘은 포암산 “삼베빛 물든 바위가 흰구름 쓰고” 신스틸러(scene stealer)가 되어 어머니와 함께 흥에 겨워 너울너울 춤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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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장(1952~ ) 시인, 평론가, 전북 김제 출생, 《믿음의 문학》(2000) 신인상 등단, 한국문인협회,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부이사장 역임, 부천문인회 명예회장, 한국NGO신문 신춘문예 운영위원, 시집: 『왕릉』 『고라실의 안과 밖』 『천관녀의 달』 『99인의 자화상』 등 18권, 동시집: 『서쪽에서 해뜬 날』 『하얀 꽃바람』, 평론집: 『언어의 광합성, 창의적 언어』, 제5회 전영택문학상, 제36회 시문학상 등 수상